이미지 인문학2 _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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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카메라가 등장함으로써 사진의 존재론에 볹리적 변화가 생겼다. 그 변화는 지표성의 상실로 요약될 수 있다. 바르트, 손탁 등은 사진을 모두 있었ㅇ던 것, 존재했던 것을 기록한다는 점에 있어서 ‘죽음’과 연결했고. 결국 바르트의 푼크툼은 사진의 지표성과 관련됨을 보여준다. 문제는 사진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이동하면서 그 지표성이 상실되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묻는다. ‘과연 디지털 사진에도 푼크툼이 존재하는가?’

마이클 프리드 역시 디지털 사진에서는 푼크툼을 찾기 ㄴ힘들다고 본다. 왜냐하면, 합성사진에는 바르트가 말하던 의도치 않은 디테일, 우연하게 포착된 디테일이 존재하기 힘들고, 때로는 아예 피사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데 punctum이 성립불가하다는 입장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할까? 새로운 디지털 시대의 punctum이 있지 않을까?

디지털 미술의 punctum을 uncanny와 연결할 수있다고 진중권은 보고 있다. 디지털 사진이 발산하는 uncanny한 분위기. 디지털 사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거나 이미 존재하는 것이 실재보다 더 강렬하게 존재하는 것이 가능해 진다. 이 존재의 부정합 역시 uncanny한 분위기를 발산할 수 있다. 이렇게 punctum과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Lev Manovich의 Synthetic realism-합성 사실주의. 이것을 진중권은 강형구의 회화에서 찾는다.
이 합성 사실주의에서 기존의 것과는 다른, 즉 벤야민에 의해서 붕괴되었다고 지적된 바 있는 아우라의 새로운 형태가 가능하지 않을까? 라고 본인은 생각해 보는 중임.
벤야민은 유일무이한 존재로부터 회화의 aura가 발생하고, 따라서 사진에서는 그것을 찾아볼 수 없다고 이야기 했는데 – 동시에 벤야민의 논문에서 아우라를 ‘시선의 마주침’으로 정ㅎ의하는 부분이 있다.
“아우라의 경험이란 인간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응형식을, 무생물 내지 자연적 대상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에 옮겨 놓는 데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시선을 주고 있는 자나 시선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 자는 우리에게 시선을 되돌려 준다. 우리가 어떤 현상의 아우라를 경험한다는 것은 시선을 되돌려 줄 수 있는 능력을 그 현상에 부여하는 것을 뜻한다.”

강형구의 회화, 극도로 확대된, 존재하지 않는 인물의 거대한 초상과, 그 눈빛과의, 시선과의 마주침은 일종의 uncanny한 충격을 준다. 이것이 그의 작업이 지니는 punctum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진의 푼크툼은 지표성에서, 실제로 존재했던 것에서 나온다. 하지만 강형구의 작품은 한갓 픽션에 불과하다. 그것은 없었던 것을 마치 있었던 것처럼 제시하는 거짓말이다. 지표성이 없는 이미지가 이렇게 푼크툼을 갖는 것은 ‘현실’의 정의가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현실은 그저 복제되는 데 그치지 않고 생성되거나 합성되고 있다. 현실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인공적으로 생성되고 합성된다. 그것이 디지털의 현실이다. 강형구의 작품이 보여주듯이 인공현실도 자연화하면 푼크툼을 가질 수 있다.” p.61.

–이것이 new-punctum이라고 할 수 있을 듯 싶다. 이 concept를 내 작업과 연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인공현실- synthetic reality, mixed reality가 punctum / aura를 갖게 되는 것. 새로운 형태의 진화한 형태의.
뉴미디와 올드미디어는 서로 재매개하면서 발전한다. 미학의 차이가 발생한다. 새로운 매체의 미술.
이 시대의 대중.. 사람들은 이미 디지털 미학에 아날로그 미학의 역할을 요구하지 않는다. 아날로그 사진과 다른 디지털 이미지의 고유한 특성에 매료되고 있다. 강형구의 작품은 디지털 대중의 이 변화된 이미지 취향, 그들의 진화한 지각방식을 증언한다.
People’s way of perception has changed under the condition of digital media.
EVOLVED PERCEPTION IN THE AGE OF DIGITAL REPRODUCTION

p.70.
마노비치의 말대로 리얼리즘은 언제나 사진의 리얼리즘이어서 우리는 사진처럼 보이는 것을 리얼하다고 여긴다. 사진적 지각의 패러다임은 완고하여, 아직도 우리는 사진에 찍힌 거승ㄴ 언젠가 현실에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사진과 같은 리얼리즘을 구현한 이미지를 보면, 자연ㅇ스레 그 지시체가 실재했다고 믿게 된다.
디지털 시대의 역사개념은 변화한다. 더 이상 역사는 기록되지 않으며 (좀 극단적임) 영상물과 비디오물 imagery and videory만이 존재한다. 디지털이 과거를 재목적화할 때 역사는 서사와, 사실은 허구와, 현실은 가상과 뒤섞인다.
디지털 테크놀러지는 리얼리즘의 준거를 과거에서 미래로 옮겨놓았다. 디지털 이미지는 이미 존재하는 것의 뒤늦은 재현이representation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의 선재적 현시presentation이다.

바르트의 시각에서 보면 Digital Punctum이라는 표현 자체가 형용모순일 것이다. 푼크툼이 성립할 근거가 사라진 곳에서 푼크툼의 효과를 말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난센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 대한 낡은 관념을 고집할 수는 없다. digital technology와 함게 현실의 정의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주체과 객체, 피사체의 관계 자체가 변화한다.
이미 reality에 대한 개념이 확장되고 변화했기 때문에 new-punctum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가상적virtual이라는 말은 이제 더 이상 가짜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실현될 수 있는 것, 즉 잠재성latency를 의미한다. 디지털의 본질은 잠재적인 것의 탐색에 있다.

자아개념 또한 변화한다. 바르트의 사진이 정체성을 고정시킨다면, 코팅엄Ketih Cottingham의 사진은 그것을 유동시킨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자아의 혼합성heterocity이다. 자아와 정체성의 개념을 유동적인 것으로 흔들어 놓는 것은 물론, 주체의 해체라는 포스트모던과 상통. 즉 인간, 자아마저 이제는 주어지는 것 datum이 아니라 제작되는 것 factum으로 봐야 한다. 이미지의 합성과 생성으로 연출하는 촉각적 효과를 우리는 과거와 달라진 현실이 낳은 새로운 유형의 푼크툼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진의 객체는 이제 피사체가 아니다. 차라리 투사제이다. — 이 같은 논리가 영상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my concern.

아날로그 초상이 현존하는 것의 재현representation이라면, 디지털 초상은 잠재적인 것의 현전presentation이다.

UNCANNY
디지털 이미지가 뿜어내는 푼크툼은 언캐니의 효과와 관련이 있다. 디지털 이미지의 언케니는 더는 초현실주의자들의 그것처럼 전복적이지 않고, 오히려 유미적이기까지 하다.
UNCANNY:
에른스트 옌치; Ernst Jentsch 독일의 심리학자가 처음으로 제시한 개념. 언케니한 감정의 원인으로 지적 불확실성, 특히 생명이 없는 것과 있는 것 사이의 불확실성을 지적한다.
옌치가 의식의 측면에서 언캐니를 지적 불확실성으로 규정한다면,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측면에서 그것을 거세공포의 강방적 회귀로 규정한다. 억압된 것의 반복적인 회귀야말로 uncanny한 분위기를 설명한다.
인간행동을 구성하는 다차원의 신호들이 미묘한 부조화를 이룰 때 언캐니 효과가 발생한다.

CGI 측면에서 보는 uncanny.
현실과 가상의 사이에는 여전히 간극이 존재하고, 그 간극은 언캐니 밸리의 근원이 된다.
아날로그의 연속성과 디지털의 불연속성, 이 둘의 간극에 대한 입장들.
Vilem Flusser는 현실과 가상의 차이는 결국 밀도 혹은 해상도의 차이라고 이야기한다. Steven R. Holtzman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원리적 차이를 강조한다. 0과 1의 조합이라는 디지털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Lev Manocich는 CGI에 있어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간극은 극복된지 오래되었다고 본다. 오히려 과도하게 디지털은 완벽하고 고해상도 이미지를 구현한다.
CG는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홀츠먼의 주장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렸따. 홀츠먼은 디지털이 불연속적이라고 주장하지만, Manovich는 실은 디지털이 아날로그보다 더 연속적이라고 말한다. CG에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간극은 디지털의 부족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디지털의 과도함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CG는 아직 원근법 이전의 단계에 있다. – interesting point.
한 화면 안에서 서로 이질적인 기술들이 애매하게 결합된다. 이를테면 인물의 CG는 와이어 프레임ㅇ에 스킨을 입히는 polygon에 기반해서 제작되고, 배경 CG는 대개 fractal algorithm에 따라서 수학적으로 생성된다. 게다가 불, 물, 연기, 안개 수풀, 덤불에 따라 각각 다른 software가 요구된다. 결국 현재의 CG는 이 모든 이질적 기술을 그러모으고는 봉합선을 슬찍 지워놓은 것에 불과하다.
uncanny valley – 모리 마사히로 ‘섬뜩함의 계곡’


언케니는 디지ㅓㄹ의 잠재적 특성인지도 모른다. 이지털 이미지 속에서 가상은 현실만큼이나 실재적으로 되고, 현실은 가상만큼이나 유령스러워진다. 디지털 이미지는 후기낭만주의의 언캐니 취향을 다시 불러내고 있다.
정신분석학에서 uncanny는 그 동안 억압되어왔던 것이 통합된 정체성이나 미적 규범이나 사회질서 등을 파열시키면서 회귀하는 것을 볼 때 생기는 심리적 분위기.
uncanny comes from the German word, Ynheimlich adopted by Ernst Yentsch.
낯익은 낯섦.
언캐니는 억압에 의해 낯선 것이 되어버렸으나 원래는 낯익던 현상이 되살아나는 것과 관련된다. 억압되었던 것이 되살아나면 주체는 불안해진다. 주체가 이해하기 힘든 모호한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언캐니는 이 불안한 모호함 때문에 생기는 직접적 결과다. p.141.
낯익은 낯섦은 결국 죽음의 충동과 연결된다.
with Digital technology, uncanny have come into the main realm of aesthetic. 시각문화의 주요한 미적 범주로 복귀했다.
오늘날 인간과 기계,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가 무너졌다면, 그것은 인간이 무생물로 격하되기 때문이 아니라 기계가 생물로 진화하기 떄문이다. 이 시대의 언캐니는 초현실주의가 아니라 차라리 초합리주의의 산물이다. 오늘날 언캐니는 억압되지 않고 외려 권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기묘한 유미화를 통해 언캐니는 새로운 미의 이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는 언캐니에서 더는 과거의 초현실주의자가 노리던 해방적 역할을 기대하기가 힘들어졌음을 의미한다. p.153.


디지털과 더물어 카메라가 수동적 매체에서 능동적 매체로, 즉 이미지를 기록하던 매체에서, 이미지를 생산하는 매체로 변신을 완료했다. from documentation to proudction.
신화적 상상은 철학적 사유에 밀려나고, 근대 이후 허구와 실재를 넘나드는 상상력은 허구와 실재를 구별하는 분별력에 자리를 내어준다. 신화의 역할로 아동문학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p.164.
Mathew Barney, Orlan, Stelarc등은 모두 신이 정한 질서, 휴브리스hubris를 거부하는 네메시스nemesis, 처벌이 대상이 되는 짓을 하고 있다. 자아 개념, identity, gender에 대한 도전. 자아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되는 것이다. 신체와 기계 사이의 경계도 허물어진다. Mathew Barney의 Cremaster는 신화학과, 지질학, 생물학을 결합시킨 transhumand natural history같은 것.

기술의 발전과 그로 인한 후기 생물학 : 정보공학 / 하이브리드 / 생명공학 /
생명으로서의 작품 / 형질전환 예술 / 조직배양 예술 / 인공생명 AL / AI /
창조론적 접근방식 / 기계공학과 진화론의 결합
테오 얀센 등의 in machina.

생명이 있는 것과 생명이 없는 것 사이의 구별이 사라질 때 나타나는 효과가 Uncanny.

digital technology가 변화시키는 것들.
정보혁명의 인터페이스, 디지털 시대에서는 인간이 상수/ 기계가 변수
이전의 모던시대 -산업혁명의 시대에서는 인간이 변수였다. 기계에 맞춰 적응해야만 했다. 이러한 모더니즘의 미학은 디지털 시대에 와서 타당성을 잃기 시작한다. 매체성의 종언이 선표된다. 포스트모던이라는 변화된 취향을 낳은 사회적 변혁은, 즉 digital revolution이다. 포스트 모던은 모던과의 단절인 동시에 그 연장이다. 그것은 지배적 이미지가 사진과 영화에서 디지털 영상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를 지배하는 것은 주술적 상상력이 아니라 기술적 상상력이다. (from Vilem Flusser)
현재는 기계를 생체에 가깝게 디자인 하는 것이 중요해 진다. 즉, 기계도 생명처럼 진화해야 하는 것이다.

회화의 수용방식은 정신집중sammlung이고, 벤야민이 이야기한 영화의 수용방식은 정신분산 zerstreunng이다. 수동적 몰입에 반대ㅎ되는 적극적 수용의 또 다른 예로 벤야민이 든 건축은 촉각적 taktil 행위이다. 그러나 이 디지털 시대에서 몰입이냐, 각성이냐 같은 이분법은 유효하지 않다.
탈신체화 재신체화, 몰입과 중단, 대상적 차원과 메타적 차원을 수시로 넘나든다. 디지털 가상의 수용은 이미 몰입 or 각성의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섰다. p.274.

혼합매체가 일반화한 시대에는 매체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것이 외려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회화와 사진의 경계를 사라졌고, 이 post media 현상을 낳은 것은 digital technology이다. 오늘날 디지털 사진은 사진도 그 구성요소의 일부로 포함하는 회화의 일종이다. p.276

현대 사진의 deadpan은 성격이 아니다. 그 냉담함은 현실 인식을 위한 것도 아니고, 세계 변혁을 위한 것도 아니다. 데드팬은 현존하는 질서에 무관심하거나 중립적이다. 그것은 정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건조하다. 이 냉담함은 그저 미적효과로서만 존재한다. 유미적 입장. 기존의 모더니즘 미학으로 볼 떄에는 무책임하거나 혹은 속빈 강정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성급하 주관적 판단을 배제하고 사안에 무판단적으로 접근하는 시대적 경향으로 볼 수 있다. 오히려 이것을 통해서 존재의 비밀이 열리는 경이를 체험할 수 있다.

모더니즘은 제 매체성을 의식적으로 드러내는 자의식을 가졌지만, 디지털 매체에서 모더니즘의 미학은 효력을 잃는다. 무기적 미학은 새로운 유형의 무기적, 유기적 미학으로 변화한다.

벤야민의 Punctum의 변화
벤야민은 정신분석학과 연결해서, 푼크툼의 전제조건으로 비의도성을 꼽는다. 시각적 무의식의 층위. 그러나 이것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는 다르다. 벤야민의 푼크툼은 일종의 사회적 인식론이다. 벤야민에게 시각적 무의식은, 사물의 감추어진 측면을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라캉의 푼크툼은 실재계로부터 나와서 상징계를 전복하며 우리는 건드리는 것, 즉 투케tuche이다. 그러나 벤야민의 시각적 무의식은 해독해야 할 일종의 스투디움으로서, 실재계를 알리지 않고 곧바로 상징계의 질서로 편입한다.


프로이트에게 uncanny는 낯익은 것이 낯설게 나타나는 현상.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uncanny는 상상과 현실의 구분의 붕괴에서 언캐니한 형이상학적 전율으르 느낀다고 말했다. 이처럼 한동안 모더니즘에 의해 무시되던 초현실주의적인 imagery가 다시 복귀하고 있다. 이러한 바탕에는 uncanny 취향이 깔려있다. 이전의 초현실주의 uncanny가 죽음 충동과 연결되었다면, 현대 digital technology의 uncanny는 반대로 생명과 닿아있다. 디지털 예술에서는 언캐니의 정서적 충격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Roland Barthes의 사진의 세계 역시 상상계-상징계-실재계의 순서로 변화해 왔다. 바르트는 자신의 punctum을 라캉의 tuche와 동일시 한다. 그 안에 도상-상징-지표의 성격을 갖고 있다.
Flusser의 디지털 가상은 라캉의 상징계-상상계와 다르다. 라캉의 것은 서로 동화될 수 없는 반면에, 플루서의 둘은 협력이 가능하다. 기술적 상상력을 통해서. 이 디지털의 실재계는 인위적으로 창조된 실재이기에 동화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라캉의 실재계는 주어진 사실datum이지만, 디지털 가상은 어디까지나 만들어진 실재faktum이다. 따라서 punctum의 성격도 다를 수 밖에 없다.


analog punctum이 향수적이라면 digital punctum은 예견적이고, analog uncanny는 외상적이라면, digital uncanny는 유희적이다. this is the essence of these 2 volumes of books.

1960년대 중반의 포스트 모더니즘이 주로 시뮬라르크와 혼성오방으로 상상계와 상징계에 파열을 내는 황홀경을 즐겼다면, 1990년대 중반의 포스트 모더니즘은 기괴하거나 혐오스러운 오브제로 그 붕괴가 초래한 공포를 우울함 속에 드러내려 했다. 이후 현재 digital age는 유희적인 형태로 상상계와 상징계가 하나로 동화되는 실재계를 창조한다.
Uncanny는 현대성과 더불어 시작된 철저히 역사적인 현상이다. 이 uncanny 취향이 모더니티가 종언을 고하는 이 시점에 또다시 복귀한다. 포스트모던의 언케니 취향은 모던의 그것과는 다른 맥락을 갖는다. 이 회귀한 uncanny 취향은 20세기 초의 초현실 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기술적 배경을 갖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죽음과 생명의 경계/ 실재와 상상, 가상의 경계가 불분명해 지는 지점을 탐색한다는 점은 동일하나, 초현실주의의 uncanny의 경우, 그것은 죽음충동에 이끌렸다면, digital age의 uncanny취향은 생명공학을 추구하는 삶충동으로부터 기인한다. 따라서 뉘앙스가 다를 수 밖에 없다. –> 산업의 성격이 달라졌기 때문.
고전적의미의 uncanny / punctum / tuche는 상상계-상징계로 실재계가 돌출하고 그로인한 낯익은 것의 낯섦 / 기괴함이 연출되는 것이었다면,
현재 digital에서는 오히려 상상계-상징계의 연합으로 tuche가 연출된다. 이 연출된 tuche, 제작된 punctum은 유희적이고, 관음의 대상이다.

현대의 테크놀러지는 역사적-진화론적 분류체계를 무력화한다. 물질에서 생명을 창초하려는 과학적 유물론의 산물이다. 디지털 가상은 죽음의 영역을 들여다보는 섬뜩함을 죽음의 기술적 극복에 대하 ㄴ작관적 기대 속에서 유희적으로 재생한다. uncanny의 유미화는 가능하다.

초현실주의는 산업혁명으로 비롯된 기계화에 따른 충격의 산물이었다.
현재의 digital revolution의 인터페이스는 인간을 상수로 놓고 기계를 변수로 둔다. 완전히 반대의 경우가 된 것이다. 현재의 technology는 사물을 생명화하고 있다. uncanny 개념의 변화와 마찬가지로 mimesis 또한 변화한다. technology의 발전과 함께 다시 부상. 회귀 중이다.


20세기 후반의 포스트모던은 flusser가 지적한 linear world의 위기, 텍스트의 한계이다. 실재가 사라진다. simulacre의 무하 ㄴ반복. 이 실재가 사라진 곳에 hyperreal 초실재가 등장한다. 실재보다 더 강력한 surface를 지님. Baudrillard 가 이야기하는 simulation은 실재를 대신하는 가상이다. Flusser의 가상은 더 급진적인 것으로, 상상계와 상징계의 연합이다.

이 digital age의 uncanny / punctum / deadpan은 허무주의적이나, 이것은 니체적 의미에서 창조적 허무주의, 급진적이고 적극적인 허무주의이다. 디지털 인간은 자신을 외상적 주체가 아니라, 창조적 기획으로 느낀다. 이것이 디지털의 세계감정이다. 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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